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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히로유키 (야구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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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바야시 히로유키는 일본의 전 야구 선수로, 지바 롯데 마린스, 한신 타이거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등에서 투수로 활동했다. 1996년 지바 롯데에 입단하여 2000년대 초반 선발과 구원을 오가며 활약했고, 2005년에는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010년에는 등록명을 '고바야시 히로'로 변경하여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후 한신, 독립 리그를 거쳐 2014년 세이부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으며, 은퇴 후에는 코치와 감독으로 활동하며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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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히로유키 (야구 선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2010년 지바 롯데 마린스 시절의 고바야시 히로유키
2010년 시즌 중 지바 롯데 마린스 시절의 고바야시
이름고바야시 히로유키 (小林 宏之)
출생일1978년 6월 4일
출생지사이타마현 소카시
신장185cm
체중85kg
포지션투수/감독
투구/타석우투우타
선수 경력
소속 팀 (선수)지바 롯데 마린스 (1998–2010)
한신 타이거스 (2011–2012)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2014)
소속 팀 (감독)무사시 히트 베어스 (2016–현재)
드래프트1996년 드래프트 4순위
데뷔 (NPB)1998년 7월 4일
마지막 출장 (NPB)2014년 8월 28일
NPB 통계
승-패75승 74패
세이브29
평균자책점3.57
탈삼진1135
국가대표 경력
대표팀일본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06년
메달}}


감독/코치 경력
코치시나노 그랜드세로스 (2014)
감독무사시 히트 베어스 (2015-2017)

2. 지바 롯데 마린스 시절

가스가베쿄에이 고등학교에서는 3학년 봄 현 대회 우승, 여름에는 베스트 8로 활약[3]。1996년의 드래프트 회의에서 지바 롯데 마린스로부터 4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같은 학교는 프로 야구 선수를 다수 배출했지만, 대학이나 사회인을 거치지 않고 바로 프로에 입단한 것은 고바야시가 처음이었다.

프로 1년 차에는 주니어 올스타에 출전했고, 이듬해 1998년에 1군 첫 등판을 했다.

1999년과 2000년에는 1군 등판이 없었다.

5년 차인 2001년 후반부터 1군에 정착. 7월 9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18차전 (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10회 초 3점 뒤진 상황에서 등판하여 1/3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고, 10회 말 공격에서 프랭크 볼릭이 만루 홈런을 날려 역전 사요나라 승리를 거두면서 프로 첫 승을 거두었다. 이 해에는 22경기에 등판하여 방어율 3.70의 성적을 남겼다.

2002년에는 당초 선발 투수로 기용되었지만, 결과를 내지 못하고 셋업으로 전환하여 활약했다. 8회를 고바야시 히로유키, 9회를 고바야시 마사히데로 잇는 투수 릴레이는 '고바야시 릴레이'라고 불리며, 승리 패턴의 계투로 정착했다. 또한 올스타 게임에도 처음 출전했다. 이 해에는 58경기에 등판하여 방어율 2.53이었다.

2003년에는 개막부터 구원 투수로 활약. 시즌 중반에 다시 선발로 복귀하여 그대로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했다. 프로 입단 후 처음으로 규정 투구 이닝을 달성하고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으며, 최종적으로 50경기에 등판했다.

2004년 개막 전에 당시 18세의 여성과 결혼[4]。 같은 해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으로서 처음으로 시즌 내내 선발 기용되었고, 8월에는 본인 첫 월간 MVP도 획득했지만, 9승에 그쳐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는 놓쳤다.

2005년에는 세-퍼 교류전 중 타격에서는 타율 3할에 3타점, 투구에서는 6경기에서 5승 0패의 성적을 거두며, 팀의 교류전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교류전 MVP도 획득했다. 교류전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는 등판 직전에 장남이 태어났다. 본인 말로는 "수면 시간 3시간 정도"라는 컨디션 속에서 끈기 있는 투구를 보여 승리를 거두었고, 경기 후의 히어로 인터뷰에서는 기쁨을 폭발시켰다. 정규 시즌에서도 시미즈 나오유키, 와타나베 슌스케와 함께 선발 삼각 축의 한 축으로서 활약하여 12승 6패, 방어율 3.30의 성적을 거두었다. 플레이오프, 일본 시리즈에서도 활약하여 팀의 일본 제일에 기여했다. 이듬해 1월 1일 TBS 계열에서 방송된 『스포츠맨 No.1 결정전』에서는 첫 출전임에도 몬스터 박스에서 16단, 샷건 터치에서 12m 50cm를 기록하여 종합 6위에 올랐다.

2006년에는 개막 전 3월에 개최된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의 WBC 일본 대표로 선출되었지만, 미국 체류 중 발열을 일으키는 등 컨디션이 올라가지 않아 제2 라운드 이후 등판하지 못했다.

시즌에서는 WBC의 영향으로 다리에 부상을 입어 개막부터 늦어졌지만, 4월 26일 오릭스 버팔로스와의 경기에서 첫 등판하여 2안타 완봉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시즌 마지막 등판이었던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경기에서 10승을 거두며, 본인 첫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다.

2007년에는 시즌 내내 선발 로테이션을 지키며, 자기 최다 투구 이닝을 달성했다. 13승을 거두며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기록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도 제1 스테이지 제2전, 제2 스테이지 제2전에 선발했지만, 제1 스테이지에서는 2회 도중 6실점의 대 부진으로 패배, 제2 스테이지에서는 다리 경련이 멈추지 않아 4회 도중에 강판했다. 같은 해에는 베이징 올림픽 아시아 예선 일본 대표로 선출되어, 첫 경기인 필리핀전 7회에 등판하여 타자 3명, 2탈삼진으로 마무리했다. 시즌 후에는 포스팅 시스템에 의한 메이저 리그 이적을 구단에 호소했지만, 인정받지 못했다.

2008년에는 프로 12년 차에 처음으로 개막 투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와의 경기)로 지명되었다. 상대 투수인 다르빗슈 유와 맞대결을 펼쳐 6회 도중까지 무실점으로 막아냈지만, 다리 경련으로 강판되어 패전 투수가 되었다. 그 이후로는 오른쪽 어깨 통증을 호소하기도 하며 부진이 이어져, 최종적으로 5승 12패, 자기 최악의 방어율 5.02로 끝났다.

2009년에는 선발 로테이션의 한 축을 담당했지만 4승에 그쳤고, 리그 최악인 13패를 기록했으며, 방어율도 4.29로 2년 연속 규정 투구 이닝을 달성하지 못했다. 구원 투수로서 4경기에 등판하여 무실점으로 막아냈고, WHIP 0.78, 피안타율 .130으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에, 시즌 오프에 구원으로의 전환을 결심했다[5]

2010년부터 등록명을 '''고바야시 히로'''로 변경. 1998년부터 2007년까지는 고바야시 마사히데가, 2008년과 2009년에는 고바야시 노리유키가 같은 구단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스코어보드나 신문상에서는 '고바야시 히로' 표기가 사용되고 있었다. 2010년 시즌에는 동명이인의 선수가 없어졌지만, 본인은 '고바야시 히로' 표기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고바야시'에 대해 위화감을 느껴 야마모토 마사와 마찬가지로 성과 이름의 첫 글자를 조합하여 성명의 구분을 두지 않는 등록명으로 한 것이었다. 이 해에는 오픈전에서 오른쪽 팔꿈치를 다쳐 2군에서 개막을 맞이했고, 상태에 따라서는 장기 이탈의 가능성도 있었지만, 개막 7번째 경기인 3월 30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경기에서 1군에 복귀하여 시즌 첫 세이브를 올렸다. 4월 26일에는 해외 자유 계약 (FA) 권을 획득[6]。 연간 통틀어 수호신을 맡아, 최종적으로 3승 3패 29세이브, 방어율 2.21로 좋은 성적을 거두었지만, 개막부터 5월까지는 방어율 0.00, 8월에도 월간 방어율 0.69로 호투한 반면, 6월은 월간 방어율 5.19로 부진에 빠졌고, 9월에도 월간 방어율 4.72로 구원 실패가 잇따라, 막바지에는 세이브 기회에서도 등판을 회피하는 등, 달에 따라 컨디션의 기복이 심한 시즌이 되었다. 시즌 후에는 오랜 꿈이었던 메이저 리그를 목표로, 해외 FA 권을 행사했다. 구단은 위로하지 않고, 잔류 선언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했다. 그 후, 일부에서는 여러 메이저 구단이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보도되었지만, 결국 메이저 계약 오퍼는 없었다.

2. 1. 1997년 ~ 2001년

가스카베교에이 고등학교를 거쳐 1996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지바 롯데 마린스로부터 4순위로 지명을 받아 입단, 프로 5년차인 2001년 시즌 종반 무렵 1군에 합류했다. 그 해 7월 9일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8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10회초에 구원으로 등판, 1/3이닝을 던져 무실점으로 호투하는 등 데뷔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는 고바야시가 등판하기 전에 후지타 소이치가 오미치 노리요시에게 3점 홈런을 허용하면서 패색이 짙은 상황에 몰렸지만 연장 10회말의 공격에서 프랭크 볼릭이 만루 홈런을 때려내 역전 끝내기 승리가 된 경기였다.

2. 2. 2002년

시즌 초에는 선발로 기용되었지만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한 채 그 후 중간 계투로서 활약을 했다. 8회 고바야시 히로유키·9회 고바야시 마사히데와 연결하는 일명 ‘고바야시 릴레이’라고 불리는 등 승리 패턴의 중간 계투로서 활약했고 데뷔 후 처음으로 올스타전에도 출전했다.

2. 3. 2003년

개막 이후부터 구원 투수로 활약하다가 시즌 중반에 다시 선발 투수로 복귀하여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했다. 처음으로 규정 투구 횟수를 채웠고 시즌 두 자릿수 승리(10승)를 달성했다.

2. 4. 2004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당시 18세의 여성과 입적했고 그 해 시즌에는 선발 로테이션의 일각으로서 처음으로 시즌을 통해 선발로 기용되어 8월에는 처음으로 월간 MVP를 차지했다. 그러나 두 자릿수 승리에는 이르지 않았고 전체적으로는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2. 5. 2005년

그 해에 처음 도입된 교류전에서는 타율 3할대와 3타점의 타격 성적을 기록했고 투수에서는 6경기에 등판하여 5승 무패라는 뛰어난 성적을 남기는 등 팀의 교류전 우승에 기여했고 교류전 MVP를 석권했다. 시미즈 나오유키, 와타나베 슌스케 등과 함께 선발 로테이션의 일각으로서 활약하여 시즌 12승 6패와 평균자책점 3.30의 좋은 성적을 남겼다. 플레이오프와 일본 시리즈에서도 맹활약을 하여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그 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에서의 등판 직전에 장남이 탄생하여 “수면 시간이 3시간 정도”(인터뷰에서의 본인 발언)라는 컨디션으로 승리를 거둔다. 그 후 히어로 인터뷰에서 요미우리전 중계로 전국적으로 방송되고 있는 와중에 장남의 탄생에 대한 기쁨을 맛보았다.

2. 6. 2006년

제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었는데 미국에 체류하고 있던 도중 발열 증세를 보이면서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본선에서의 등판하는 일은 없었다.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의 영향으로 여겨지는 다리의 통증이 일어나 개막 이후부터 출발이 늦어졌지만 4월 26일의 오릭스 버펄로스전에서 첫 등판해 2개의 피안타와 98개의 공을 던져 완봉승을 거뒀다. 그 후 시즌 마지막 등판이 된 세이부 라이온스전에서 10승째를 올리는 등 2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달성했다.

2. 7. 2007년

고바야시는 시즌을 통해 선발 로테이션을 지키면서 개인 최다 투구 횟수(170.2)를 달성했고 13승을 올리는 등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 기록을 경신했다. 클라이맥스 시리즈 제1 스테이지(2차전)와 제2 스테이지(2차전)에서 선발 등판했지만 제1 스테이지에서는 2회 도중 6실점을 기록해 패전 투수가 되었고 제2 스테이지에서는 다리의 경련으로 4회 도중에 강판당했다. 같은 해 베이징 올림픽 아시아 예선 일본 대표팀 선수로 발탁되었고 등번호는 지바 롯데에서 달고 있는 41번을 이나바 아쓰노리에게 양보하면서 14번으로 배정받았다. 첫 경기인 필리핀전에서 타자 3명을 2개의 탈삼진으로 잡았다. 시즌 종료 후 포스팅 시스템에 의한 메이저 리그 진출에 대한 희망을 호소했지만 실현되지 않았고 재계약과 관련해서는 2억 엔+인센티브의 2년 계약을 맺었다.

2. 8. 2008년

프로 데뷔 12년 만에 처음으로 개막전 선발 투수(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전)로 지명되었는데 당시 상대 투수는 다르빗슈 유였다. 6회 도중까지 무실점의 호투를 보였지만 갑자기 다리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강판 당해 패전 투수가 되었다. 그 이후에는 오른쪽 어깨 통증이 일어난 적도 있어 뚜렷한 성적을 내지 못한 채 결국 5승 12패와 평균자책점 5.02의 사상 최저 성적을 기록해 선발 투수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2. 9. 2009년

선발 로테이션의 일원으로서 활약을 했지만 4승 13패와 4.29의 평균자책점 등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최악의 성적을 기록해 그대로 시즌을 마감했다. 구원 투수로 등판할 시에는 4경기에 등판하면서 무실점, WHIP 0.78, 1할 3푼의 피타율로 호투했다.

2. 10. 2010년

그 해 4월 6일부터 등록명을 '''고바야시 히로'''(고바야시 히로/小林宏일본어)로 변경했다. 시범 경기에서 오른쪽 팔꿈치에 부상당했기 때문에 개막을 2군에서 맞이하게 되었고 상태에 따라서는 장기적인 전력 이탈의 가능성도 있었지만 개막 이후 7경기째가 되는 3월 30일의 1군 복귀 무대인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전에서 첫 세이브를 올렸다. 4월 26일에는 메이저 리그에 진출할 목적으로 FA권을 취득했고 최종적으로는 3승 3패 29세이브, 평균자책점 2.21, WHIP 1.07로 좋은 성적을 남겼지만 개막 이후부터 5월까지 평균자책점 0.00, WHIP 0.72, 8월에는 월간 평균자책점 0.69와 WHIP 1.08으로 호투한 반면에 6월에는 월간 평균자책점(5.19)과 WHIP(1.73)의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다. 9월에는 월간 평균자책점 4.72로 구원 실패가 잇따라 나오게 되면서 특히 시즌 종반에는 세이브를 올릴 기회에 등판하는 것을 피하는 등 불안한 시즌을 보냈다.

시즌 종료 후에는 자신의 꿈인 메이저 리그 진출을 목표로 하여 FA권을 행사해 구단 측은 이에 만류하지 않았고 잔류하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 후 복수의 메이저 구단이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라는 내용의 일부 언론에 보도되었지만 메이저 리그 계약의 오퍼는 없었다.

3. 한신 타이거스 시절

2011년 1월 20일에, 마무리 투수 후지카와 큐지에게 연결하는 중간 계투로서 영입 의사를 표명했던 한신 타이거스와 첫 협상을 벌여[7], 2년 총액 5억 엔으로 큰 틀에서 합의했다. 1월 28일에 입단 회견을 열었고, 등번호는 롯데 시절과 같은 "41"이 되었다. 개막부터 셋업맨으로 8회 마운드를 맡았지만, 전반기만 6번의 구원 실패를 기록하는 등 부진을 면치 못했다. 7월 26일 주니치 드래곤스전에서 드디어 이적 후 첫 승리를 거두었지만, 그 후에도 컨디션이 나아지지 않아 8월 28일에 2군으로 강등되었다. 9월 30일에 다시 1군에 등록되었지만, 10월 4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실점을 기록하는 등 마지막까지 불안정한 채로 시즌을 마쳤다. 최종적으로 42경기에 등판하여 1승 5패 21홀드, 평균자책점 3.00의 성적을 기록했다. 한편, 중간 계투 등판만으로 시즌을 마친 것은 롯데 시절인 1998년 이후 13년 만이다.

2012년에는 3년 만에 선발로 다시 전환했지만 부진하여 1군 승격은 없었고, 10월 2일에 전력 외 통보를 받았다[8]。11월 18일에 친정팀 롯데의 가모가와 추계 캠프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2이닝을 던져 6안타 5실점의 초라한 성적으로 불합격되었다[9][10]

3. 1. 2011년

이듬해 1월 20일, FA를 행사한 직후 구보타 도모유키, 후지카와 규지와 연결하는 중간 계투의 축으로서 영입 의사를 표명하고 있던 한신 타이거스와 교섭에 임하면서 한신에 공식 입단했다. 추정 연봉치인 2년 총액의 5억 엔으로 합의, 같은 해 1월 28일에 입단 회견을 열었고 등번호는 지바 롯데 시절과 똑같은 41번으로 배정되었다.

그러나 시즌 전반기는 6차례의 구원 실패(그 중 4패)를 당하는 등 부진에 시달렸고 7월 26일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 이적 후 첫 승리를 거두었지만 컨디션은 오르지 않고 8월 28일에 2군으로 떨어졌다. 9월 30일에는 다시 1군에 등록되었지만 10월 4일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전에서 실점을 허용하는 등 시즌 종료 때까지 불안정한 모습이 계속 노출되면서 그대로 시즌을 마쳤다.

3. 2. 2012년

4. 독립 리그 시절

2013년 1월 31일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와 마이너 계약을 맺고, 2월 14일에 계약을 체결했다. 스프링 트레이닝에 초청 선수로 참가했지만, 개막 전인 3월 4일에 해고되었다. 8월 14일에는 베이스볼 챌린지 리그(BC 리그)의 군마 다이아몬드 페가서스에 입단했다. 7경기 등판하여 2승 1패, 평균자책점 3.14의 성적을 거두었으나, 11월 2일에 퇴단이 발표되었다. 11월 22일에 열린, 2013년도 제2회 12개 구단 합동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지만, 영입에 나서는 구단은 없었다.

2014년에는 당초 대만 프로 야구의 통이 세븐일레븐 라이온스에 입단을 시도하여 테스트를 희망했지만, 통이 측에서 거부당했다. 그 후 2월 12일에 BC 리그의 시나노 그란세로즈에 입단할 것이 보도되었고, 2월 20일에 투수 코치 겸임으로 정식 입단했다. 시나노 입단 후, 셋업 투수로서 26경기에 등판. 2승 1패, 평균자책점 1.26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4. 1. 2013년

4. 2. 2014년

5.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 시절

2014년 7월 21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가 영입을 발표하여, 2년 만에 NPB에 복귀했다.[19] 다음 날인 7월 22일에 입단 회견을 가졌으며, 등번호는 '52'번으로 결정되었다.[20] 등록명은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사용했던 '고바야시 히로시'였다.[21] 7월 25일 지바 롯데 마린스전(세이부 돔)에서 2011년 10월 4일 이후 1025일 만에 1군 등판, 1이닝을 2볼넷 1탈삼진 무실점으로 막았다.[22] 이후 중간 계투로 15경기에 등판했지만, 7.94의 평균자책점으로 불안정한 성적을 기록했다.[23] 결국 10월 2일에 구단으로부터 전력 외 통보를 받았고,[23] 같은 달 22일에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24]

5. 1. 2014년

6. 은퇴 후

고바야시 히로유키/小林 弘幸일본어는 2015년 1월 8일, BC 리그 무사시 히트 베어스의 투수 코치로 취임했다. 5월 8일, 감독인 호시노 오사무가 퇴임함에 따라 감독 대행으로 취임했다. 미츠마 타쿠야에게 "프로로 가려면 스피드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오버핸드에서 사이드암으로의 전환과 근력 운동을 통한 육체 개조를 권유했고, 구속은 10km/h 가까이 올라 150km/h가 되었으며, 미츠마는 2015년 NPB 육성 드래프트 회의에서 주니치 드래건스로부터 3순위 지명되었다. 시즌 종료 후인 11월 2일, 2016년부터 감독을 맡는 것이 발표되었다. 무사시에서는 대행을 포함하여 약 3시즌 동안 지휘했지만, 2017년을 끝으로 해임되었다.

2017년 11월 29일에는 롯데 구단에서 소년 야구 지도를 하는 "마린즈 베이스볼 아카데미"의 코치로 취임하는 것이 발표되었다. 2021년부터는 같은 아카데미의 감독을 겸임한다.

7. 상세 정보

7. 1. 수상·타이틀 경력

고바야시는 2004년 8월에 월간 MVP를 수상했고, 2005년에는 센트럴·퍼시픽 교류전 MVP를 수상했다. 2006년에는 지바시 시민 영예상을 수상했다. 2007년 올스타전 1차전에서는 우수 선수상을 받았다.

7. 2. 개인 기록

고바야시 히로유키는 1998년 7월 4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11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첫 등판했다. 2001년 6월 8일 오릭스 블루웨이브(현 오릭스 버펄로스)전(그린 스타디움 고베)에서 첫 탈삼진을 기록했고, 같은 해 7월 9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8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첫 승리를 거두었다. 2001년 8월 5일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21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첫 선발 등판을 기록했다.

2003년 7월 9일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14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첫 선발 승리를 따냈고, 같은 해 9월 28일 오릭스 블루웨이브 25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첫 완투 승리를 기록했다. 2005년 8월 26일 오릭스 버펄로스 16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는 첫 완봉 승리를 거두었다.

2009년 6월 3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1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첫 홀드를 기록했고, 2010년 3월 30일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1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첫 세이브를 올렸다.

타격 기록으로는 2005년 5월 18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2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에서 첫 안타와 첫 타점을 동시에 기록했다.

2008년 7월 22일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15차전(삿포로 돔)에서 통산 1000투구 이닝을 달성했고(역대 312번째), 2009년 8월 26일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7차전(지바 마린 스타디움)에서 통산 1000탈삼진을 기록했다(역대 126번째).

올스타전에는 5회(2002년, 2004년, 2005년, 2007년, 2010년) 출전했으며, 모두 감독 추천으로 선발되었다. 그 외에도 미일 야구에 2회(2004년, 2006년) 출전했고, 2008년에는 개막전 선발 투수로 등판했다.

7. 3. 등번호

1997년부터 2014년 도중까지 등번호 41번을 사용했다. 2014년 시즌 도중에 등번호를 52번으로 변경했고, 시즌 종료 후 다시 41번으로 변경하여 2017년까지 사용했다.

7. 4. 등록명

고바야시 히로유키(こばやし ひろゆき/小林 宏之일본어)는 1997년부터 2009년, 2013년부터 2014년 도중, 2015년부터 선수 등록명으로 사용되었다. 2010년부터 2012년, 2014년 도중부터 시즌 종료 때까지는 고바야시 히로(こばやしひろ/小林宏일본어)라는 등록명을 사용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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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웹사이트 監督小林宏之 退任のお知らせ http://www.bc-l.jp/t[...] ベースボール・チャレンジ・リーグ ニュースリリース 2017-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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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서적 プロ野球スカウティングレポート2006 アスペクト
[32] 서적 プロ野球スカウティングレポート2007 アスペクト
[33] 서적 プロ野球スカウティングレポート2008 アスペクトムック
[34] 서적 野球小僧 世界野球選手名鑑2007 白夜書房
[35] 서적 おめでとう!千葉ロッテ日本一 日刊スポーツ出版社
[36] 웹사이트 虎のファッションリーダーだ小林宏 https://www.nikkansp[...] 2011-01-21
[37] 웹사이트 長髪!パンチパーマ!奇抜なヘアのプロ野球選手 https://www.daily.co[...] 2023-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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